썩으러 가는길 - 박노해 -
 감자나무 미디어로그가기
 조회 : 1883 , 2008/10/27 12:34

열여섯 앳띤 얼굴로
공장문을 들어선 지 5년 세월을
밤낮으로 기계에 매달려
잘 먹지도 잘 놀지도 남은 것 하나 없이
설운 기름밥에 몸부림하던 그대가
싸나이로 태어나서 이제 군대를 가는구나
한참 좋은 청춘을 썩으러 가는구나

굵은 눈물을 흘리며
떠나가는 그대에게
이 못난 선배는 줄 것이 없다
쓴 소주 이별잔밖에는 줄 것이 없다
하지만 철수야
그대는 썩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헛되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그대는 군에서도 열심히 살아라
행정반이나 편안한 보직을 탐내지 말고
동료들 속에서도 열외 치치 말아라
똑같이 군복 입고 똑같이 짬밥 먹고
똑같이 땀흘리는 군대생활 속에서도
많이 배우고 가진 놈들의 치사한 처세 앞에
오직 성실성과 부지런한 노동으로만
당당하게 인정을 받아라

빗자루 한 번 더 들고
식기 한 개 더 닦고
작업할 땐 열심으로
까라면 까고 뽑으라면 뽑고
요령피우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라
고참들의 횡포나 윗동기의 한딱까리가
억울할지 몰라도
혼자서만 헛고생한다고 회의할지 몰라도
세월 가면 그대도 고참이 되는 것,
차라리 저임금에 노동을 팔며
갈수록 늘어나는 잔업에 바둥치는 이놈의 사회보단
평등하게 돌고도는 군대생활이
오히려 공평하고 깨끗하지 않으냐
그 속에서 비굴을 넘어선 인종을 배우고
공동을 위해 다 함께 땀흘리는 참된 노동을 배워라

몸으로 움직이는 실천적 사랑과
궂은 일 마다않는 희생정신으로
그대는 좋은 벗들을 찾고 만들어라
돈과 학벌과 빽줄로 판가름나는 사회 속에서
똑같이 쓰라린 상처 입은 벗들끼리
오직 성실과 부지런한 노동만이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임을 온몸으로 일깨워
끈끈한 협동 속에 하나가 되는 또다른 그대,
좋은 벗들을 얻어라

걸진 웃음 속에 모험과 호기를 펼치고
유격과 행군과 한딱가리 속에 깡다구를 기르고
명령의 진위를 분별하여 행하는 용기와
쫄다구를 감싸 주는 포용력을 넓혀라
시간 나면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며
열심히 학습하거라
달빛 쏟아지는 적막한 초소 아래서
분단의 비극을 깊이깊이 새기러라

그대는 울면서
군대 3년을 썩으러 가는구나
썩어 다시 꽃망울로
돌아올 날까지
열심히 찍어라
이 못난 선배도 그대도 벗들도
눈부신 꽃망울로 피어나
온 세상을 환히 뒤흔들 때까지
우리 모두 함께
열심히 썩자

그리하여 달궈지고 다듬어진
틈실한 일꾼으로
노동과 실천과 협동성이
생활 속에 배인 좋은 벗들과 함께
빛나는 얼굴로
우리 품에 돌아오라

철수야 눈물을 닦아라
노동자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열심히 열심히
잘 썩어야 한다

 

 

Meho님 군대 잘 갔다오십시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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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alkyrie (ID) valkyrie님의 미디어로그 가기  / 08-10-27 13:56/ 이댓글에댓글달기
  저도 군대갈 때에는 시간을 썩여버린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군대를 갔다오지 않았다면 지금 사회에서 겪었던 모든 고난과 시련을 버티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군대에서의 시간은 소중합니다...
  kjh1619 (ID) kjh1619님의 미디어로그 가기  / 08-10-27 18:26/ 이댓글에댓글달기
  저는 아직 다녀오지 못한 곳이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군대에서의 시간은 썩은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쌓아야 할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더군요.
  udstd (ID) / 08-10-29 10:15/ 이댓글에댓글달기
  참 오래된 기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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