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공급 제한되는 시대에 맞춰진 저전력 트렌드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전기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써도 되는 공기나 물처럼 생각되던 시기가 있었다. 가정이나 주변에서 전기를 사용하는 기기도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기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발전소를 더 지을 수 있었다. 마치 전기는 벽에 있는 플러그에 코드를 꼽기만 하면 무한정으로 끊기지 않고 나오는 마법의 샘물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이어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를 통해 사람들의 머릿 속에 더 이상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생겼다. 전기를 사용하는 분야는 점점 늘어나는데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 문제로 점점 퇴출되고 있으며, 대체 에너지 개발은 지연되면서 전기는 더 이상 값싼 재료가 아니라 아껴쓰고 나눠써야 하는 비싸고 한정된 자원이 되었다.
당연히 산업 전반에도 어떻게 하면 전기를 적게 쓰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저전력 트렌드가 자리잡게 된다.
모바일 시대의 대두로 "저전력=배터리 수명"
PC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IT 시장은 기기의 성능 향상과 그로 인한 활용범위 확대에 목적을 두고 성장해왔다. 성능만 높일 수 있다면 발열이나 소비전력, 소음 문제도 얼마든지 허용했고, 최대 성능을 달성하면 이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당연히 늘어나게 될 거라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전력 효율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개발하면 소비 전력을 낮추는 대신, 그 기술을 이용해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성능을 끌어올리는데만 집중했다. 마치 저유가 시대에 연비 효율보다 엔진 출력만 높은 자동차들이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노트북 등 어디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정보 기기들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벽에 있는 플러그에 코드를 연결하면 전기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는 데스크탑 PC와 달리 주어진 배터리 용량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해졌다. 배터리 성능과 용량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배터리를 사용하는 부품 쪽에 전력 소비를 줄이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저전력 트렌드의 도입으로 노트북과 태블릿 같은 모바일 PC들은 전력 낭비를 줄이고 크기를 적게 차지하는 플랫폼을 만들면서, 남는 공간에 더 많은 배터리를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소비 전력은 줄이고 배터리 용량을 늘어나면서 모바일 기기의 배터리 사용 시간은 기존보다 훨씬 늘어나게 된 것이다.
성능 경쟁 끝내고 저전력 앞세운 인텔 아이비 브릿지
스마트 기기의 등장으로 시장을 장악한 저전력 트렌드는 고성능보다 가벼운 작업들을 최대한 오래, 그리고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쪽을 선호하게 되었다. 무조건적 고성능 경쟁이 빛을 잃으면서 단순히 성능만 높은 부품보다 소비 전력은 낮으면서 성능은 좋은 전력 효율을 고려한 제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인텔 3세대 코어 프로세서에 사용된 아이비브릿지(Ivy Bridge)의 경우 전통적인 CPU 성능 향상보다 내장 그래픽의 성능 향상과 CPU 전력 소모를 줄이는 쪽으로 집중했다. 저전력 제품의 경우 소비 전력을 17W까지 낮춰 노트북/울트라북에서 배터리 시간을 늘리는데 도움을 준다.
22nm 공정과 3D Tri-Gate 기술을 적용한 3세대 인텔 코어 프로세서는 2세대 제품이 95W의 전기를 소모하면서 해왔던 일을 77W(TDP)로 낮췄다. 동일한 작업을 20% 더 낮은 전력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력 효율의 향상으로 저전력 기준 제품에서는 성능 향상의 효과를, 고성능 제품에서는 전력 감소의 효과를 가져온다.
여기에 인텔 내장 그래픽 성능을 향상시켜 따로 보급형 외장 그래픽 카드를 장착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시스템에서 외장 그래픽 카드가 차지하는 공간과 소비 전력도 절약하고 발열 및 소음 문제도 해결했다. 이를 통해 전형적인 미들타워 형식의 PC 대신 올인원 PC와 미니 PC에도 3세대 코어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저전력 고성능 PC 구성이 가능하다.
엔비디아 케플러, 그래픽 카드도 전력 효율 중심
그래픽 카드 시장도 마찬가지다. AMD과 치열하게 경쟁했던 엔비디아가 지포스 600 시리즈로 시장에서 성공한 것은 기존 페르미 아키텍처의 단점을 개선한 전력 효율을 높인 케플러(Kepler) 아키텍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이밍과 GPGPU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페르미와 달리 게이밍 환경에 필요한 요소만 대폭 강화시키면서 28nm 공정으로 전환시켜 더 높은 3D 성능을 더 낮은 전력 소모로 제공하면서 특히 전력 대비 성능이 극대화된 지포스 GTX 660과 650 Ti 등 하이엔드 제품군이 유저들의 선택을 받았다.
저장장치, 작고 빠른 저전력 SSD로 변신 중
저장장치 분야에서도 저전력 트렌드가 이어지고 있다. PC에서 널리 사용되어 온 하드 디스크르 드라이브(HDD)나 광 디스크 드라이브(ODD) 같은 저장매체는 더 작고 빠르면서 전기는 덜 먹는 낸드 플래시 기반 SSD와 USB 메모리로 대체되고 있다.
특히 모바일 플랫폼에서 플래시 메모리는 전력과 크기, 속도, 안정성 등에서 HDD와 비교 불가능한 위치에 있다. 울트라북을 비롯해 맥북이나 태블릿 등이 모두 낸드 플래시를 기본 저장장치로 사용하면서 남은 공간에 더 많은 배터리를 넣을 수 있었다.
PC 시장에서도 컨트롤러 기술의 발전으로 SATA 6Gbps급 이상의 성능을 제공하면서 TLC 낸드 플래시의 도입으로 가격 하락도 기대되는 만큼 SSD 사용률은 계속 올라갈 것이다.
파워 서플라이도 출력보다 전력 효율을 우선
PC 주요 부품 뿐만 아니라 이런 부품에 전원을 공급하는 파워 서플라이 역시 무작정 와트수가 높은 제품이 아니라 전력 효율이 높은 제품을 선호하고 있다.
한 때는 CPU 오버클럭과 복수의 그래픽 카드를 멀티 GPU로 구성, 더 많은 저장장치 연결로 출력이 높은 파워가 인기를 끌었지만, 전력 대비 성능이 시장의 기준이 되면서 지금은 500W급의 출력을 기준으로 전력 효율이 높은 80 PLUS급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많다. CPU와 그래픽 카드가 이전보다 전력을 적게 소모하고, 저장장치도 SSD로 바뀌면서 500W급 파워로도 충분히 원하는 성능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워 서플라이 출력보다는 같은 출력에서 얼마나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느냐가 제품의 가격과 평가 기준이 되었고, 국내 시장에 맞춰 80PLUS급 효율을 내세우면서 가격 경쟁력을 높인 제품들도 많이 출시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
TDP에서 벗어나 Always-on으로 향하는 PC
PC 시장에서 성능을 논하는 전통적인 기준은 TDP다. 열 설계 전력(Thermal Design Power)를 뜻하는 TDP는 CPU나 그래픽 카드가 최대 성능(full load) 상태에서 얼만큼의 전력을 소비하는지, 즉 Max Power의 개념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스마트 시대로 넘어오면서 이제는 TDP보다 일반 모드에서, 유휴(idle) 상태에서, 그리고 전원을 완전히 끄지 않은 채 언제라도 바로 사용 가능한 슬립(sleep)모드에서 얼만큼의 전력을 소비하느냐가 훨씬 중요해졌다. 언제나 인터넷에 연결되어 이메일과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는 'always-on'이 기본 조건이 된 셈이다.
3세대 코어 프로세서 기반 울트라북이 스마트폰처럼 대기 시간을 줄이고 슬립 모드에서도 이메일도 SNS 업데이트를 지원한 것이 이를 반영한다. 또한 내년부터는 인텔이 TDP가 아니라 SDP(Scenario Design Power)를 새로운 지표로 활용해 지금보다 더 낮은 저전력 제품군을 강화할 계획이다.
물론 아직까지 전력보다 성능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시장은 저전력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앞으로도 PC는 저전력 트렌드에 맞춰 지금도 충분히 확보된 성능을 바탕으로 소비 전력은 낮추면서 지속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CPU 시장에서 인텔과 경쟁했던 AMD 불도저와 퓨전 프로세서가 무너진 이유도, 그래픽 카드 시장에서 라데온 HD 8000 시리즈가 지포스 GTX 600에게 이슈를 내준 배경에는 저전력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 제조사의 속사정도 있는 것이다. |